태어나기 전에는 분명히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한 사람의 평생을 바라보는 거울이라고도 한다.
유아에서 어린이로, 그리고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것은 개인의 역사를 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6세에서 12세 사이의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정의, 도덕, 성실, 똑똑함, 영리함, 안전에 주의, 타지 출신, 강력함, 순종함과 같은 개념들이 심어진다.
기억과 기억의 계승은 여기서 시작된다. 개인적인 기억과 계승된 기억이 섞여 얽혀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먼 역사는 항상 상호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작은 문제, 아이가 누구의 문제인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대유가 가정 문을 세 번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웃집 아이가 학원을 세 번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만약 이웃집에 대유와 같은 이웃이 없다면, 먼 역사에서 대유가 지나친 것은 가정 문, 용문, 공문이 아니라 작은 식탁의 문이 될 것이다.
작은 식탁만으로는 기억이라는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식탁은 메라민 판자의 것이 될 뿐이고, 황화향목으로 만들어진 팔선상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은 유아로부터 단절된다. 어떤 정도로 진실한 과거라도, 이 순간은 다시는 진실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네트워크의 노드이며, 전체 세계가 이곳에 수축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여기에 있다.
어린 시절에는 중요한 선택이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계승할 기억을 찾거나 선택하는 것이다. 환경이 다양한 기억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만약 모든 4학년 학생들이 하나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환경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5학년 학생들이 두 개 이상의 기억을 동시에 계승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격이 분열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이해력이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사람들에게 무서운 것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천년 제국은 단지 1년이고, 만년의 문화는 대유가 흙을 판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서움은 잘못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 많으면 힘이 세지고, 모인 모인 풀에서 분열하여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 먼 역사에 새로운 역사가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야영지에서 얼어붙은 개처럼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대유가 작은 식탁을 세 번 지나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가정 구조, 공통적인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매일 계단식 물 논문을 조정하는 사람이 논문을 다루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유는 그들의 신이며, 또한 신기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진 신이다. 신경망에서 찾을 수 없는 신이다.
믿음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믿음은 신뢰의 문제이다.
만약 새로운 발견된 사물들이 미리 머릿속에 넣어진 후에 다시 발견된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기억들은 이중 시간에 먼저 머릿속에 넣어지고 다시 발견된 것이다. 얼음 위에서 민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이 진짜로 중요한 것인지, 눈속에 불을 지닌 반딧불이 진짜로 중요한 것인지는 어떨까. 왜냐하면 이것은 어린 시절의 경로 선택, 기억의 선택, 사막에 미리 묻힌 지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