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이 젖을 토하니, 천하는 그 마음을 돌린다. 조자명덕이 짧은 가사행을 쓰던 시절부터, 주공의 모습은 열망하는 인물의 모습이 되었으며, 원시 부족의 지도자의 인격은 사라져 버렸다.
시작한 자가 없으면, 뒤를 이을 자가 없을까? 공자가 이런 감탄을 내뱉을 때, 주공으로부터 500년이 지났다. 주창육림의 살아 있는 제사는 더 이상은 전해지지 않는 원시적인 종교, 문화 양식으로, 주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살아 있는 제사를 없애기 위해 주인은 교화와 언급하지 않음을 사용했다. 이를 바로 봄과 가을의 글쓰기 방식이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색과 흥분의 순간에 작은 인간에게 진리를 말하려고 일어나지만, 입을 열려는 순간 위험을 느낀다.
진리의 위험은 그것의 사고적 근원과 평범한 사람의 직관이 상반된다는 점에 있다. 행복한 양의 이야기 뒤에는 철학자가 양을 물어뜯는 사실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인생은 한 가을에 불과하며, 도로 표지판은 사막에 얕게 묻혀 있다. 오늘 나는 이 내용을 낚아 올린 것이 오늘 이 분주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주조 팔백년은 송, 건, 명의 길이를 합친 것과 같으며, 이 팔백년 동안 쌓인 문명은 오늘날에는 "주"라는 한 글자만 남았다. 송, 제, 량, 진도 잠시였을 뿐이다. 지금 이 끓고 있는 제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의 치세를 갈망하고 있는가.